마가복음 67강 부자 청년과 영생(10:17-22)

Author
최세창
Date
2012-05-23 11:33
Views
1715
3. 부자와 천국[10:17-27]

<비교: 마 19:16-26, 눅 18:18-27>

천국이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부자와 천국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10:17-27)은 부자 청년과 영생(10:17-22) 그리고 천국에 가기 힘든 부자(10:23-27)로 구성되어 있다.

가. 부자 청년과 영생<10:17-22>

<비교: 마 19:16-22, 눅 18:18-23>

양식상으로 10:17-22은 아포프테그마(주 198을 보라)로 보아야 한다(R. Bultmann,1) J. Gnilka, 하권, p. 115). 아포프테그마적 말씀이 21절에 나온다. 이 말씀이 뒤따르는 부름을 받고 있으므로 이 단화는 소명 설화에 가깝다. “길의 모티브가 시사하듯이 이 단화의 서두는 마르코에 의해 형성되었다”(R. Bultmann,2) J. Gnilka, 하권, p. 115).

특히, 불트만(R. Bultmann)은 “전승된 주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곳에서도 예수께 소급시킨 교회의 생각을 논쟁대화 형태와 마찬가지로 사제대화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다.”3)라고 이 단화의 출처를 추측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4)와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5)는 이 전승의 기원이 팔레스틴 교회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서의 기록에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매우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전승 자체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요, 목격자의 증거에 기초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山口 昇).

이 부분이 어린이를 축복하신 기사 다음에 계속된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일치한다. 아마 천국에 들어갈 어린이, 즉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 즉 세상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자 사이를 대조시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길고도 상세하다.

마가는 이 기사를【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는 10:10에 언급된 집에서부터 길로 나갔을 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R. Bultmann, op. cit., p. 23.
2) Ibid.
3) Ibid., pp. 63-64.
4) Ibid.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달려와 꿇어앉아 묻자오되의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는 청년(19:20, 22), 누가는 관원(눅 18:18)이라고 했고, 세 저자 모두 재물이 많은 부자로 묘사하고 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부자 관원이다. 그가 중앙의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그는 세상이 추구하는 돈과 지위와 종교적 열심(20절)과 명예를, 그것도 젊은 시절에 얻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이 그 자신의 내적 공허 및 영적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길에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서 꿇어앉아 질문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달려와서는 그의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꿇어앉아는 가장 겸손한 태도와 지극한 존경의 태도와 애절한 간청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선한 선생님이여의 선한은 아가테(ἀγαθέ)이며 원래 도덕적 선을 의미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하나님께 대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118:1-, 왕상 16:34, 왕하 5:13). 헬라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의 중요성이나 훌륭함을 나타내었다.

유다교에서는 이례적인 선한 선생님이여(J. Gnilka, 하권, p. 116)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한 부름말이 아니라, 예수께 대한 “존경”(W. W. Wessel)과 “신뢰”(J. Calvin)를 나타낸 부름말이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의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은 9:43, 45의 주석을 보라.

부자 관원인 청년이 영생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가 의미한 바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서 배웠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가르쳤을 것이다. 다니엘 12:2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하였고, 외경서인 마카비 2서 7:9에는 “세상의 왕이 우리를 일으켜,······영원한 삶을 얻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청년이 이해한 영생이란 죽은 후에 부활하여 천국(메시아 왕국)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에서 영원토록 누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질문의 요지는 세상 끝 날에 무엇을 해야 구원 곧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레인(W. L. Lane)은 “그의 질문 형식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 또는 영생을 무력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성취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질문의 배경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7)는 “묵시문학과 함께 비로소 유다교에 퍼진 부활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구원 곧 영생을 보증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과 실행에 맞서도록 촉구하였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면 행해야 할 율법에 주목하게 되고, 율법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쿰란 종파에서 확실한 구원(영생)의 길로 간주되었던 엄격한 토라주의(율법주의)에 이르기까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설들은 이 나라의 적지 않은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혼란을 빚도록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질문에는 율법주의의 근본적인 잘못이 드러났다. 즉, 구원(영생)은 무엇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영생)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청년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이 먼저 그의 부름말을 문제 삼으신 것에 대해, 마가는【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 답변을 통해 자신의 선하심을 부정하시고(유니테리안의 주장처럼), 또한 신성마저 부정하시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답변을 그렇게 해석해 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물론 몇 가지 세세한 사항들에 있어서는 견해 차이가 있기는 하나―결론을 지어 왔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성육신이라는 상황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성장과 시험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선함을 무언으로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1)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사의 첫 진술 내용은 이와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주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V. Taylor”(in W. Hendriksen), E. P. Gould, C. E. G. Swift,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6-17).

많은 사람들1)은 이 말씀의 교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마태복음의 기록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완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이런 뜻이다. 즉, ‘너는 지금 경솔한 태도로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너는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네가 선하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다면, 홀로 선하신 하나님과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레인(W. L. Lane), 웨셀(W. W. Wessel), 스톤하우스(N. B. Stonehouse),2) 黑崎幸吉, 마경일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데에 있다. 즉,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품성에 대해 무슨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표된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율례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데에 있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학자들로 워필드(B. B. Warfield),3) 바클레이(W. Barclay), 슈바이처(E. Schweizer),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8) 등을 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질문자가 깨닫기를 원하신다. 즉, 경솔하게―질문을 받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 류벤(J. A. C. Van Leeuwen)4)의 견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B. H. Streeter, The Four Gospels, London, 1930, p. 15 이하. J. C. Hawkins, op. cit., pp. 117-125. H. R. Mackinton,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New York, 1931, p. 37 등을 보라.
2) in W. Hendriksen.
3) 상동.
4) 상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부자 관원인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피상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셨다. 만일 이 청년이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심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천박한 대답(20절)은 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명령(21절)을 복종했을 것이다.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라삐 유다교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단지 십계명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째 판의 계명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참조: 롬 13:9). 모든 잡다한 결의론(Kausistik)을 떠나서 이스라엘의 기본법이 지시되며,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의무들이 강조된다”(J. Gnilka, 하권, p. 118). 이 점에 대해 슈바이처(E. Schweizer)도 “예수님은 랍비와 대조적으로 그에게 계명들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단순히 계명들을 상기시킨다.”라고 하였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 6 계명이다(7:21의 주석을 보라).

간음하지 말라(메 모이큐세스, μὴ μοιχεύσῃς)는 제 7 계명이다(7:22의 주석을 보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 8 계명이다(7:21의 주석을 보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 9 계명이다. 사석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과 다른 증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 10 계명 대신에 첨가된 속여 취하지 말라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이 계명은 십계명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레위기 19:13과 신명기 24:14(참조: 약 5:4)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탐내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람이 남의 것을 속여 취하는 일은 탐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둘째 판의 계명들만 언급하신 이유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 계명이다(7:10의 주석을 보라).
이 계명이 세 복음서의 기사에서 맨 나중에 제시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청년이 특히 이 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J. A. Bengel, 이상근)이 있으나, 20-21절을 미루어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계명들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은 “그의 충동적 대답은 그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라고 하였고, 칼빈(J. Calvin)은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의무를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는 거짓된 확신을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려서부터의 율법 준행이란 어디까지나 문자적 의미를 따른 외적이며 피상적인 준행이었다. 그는 율법의 속뜻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율법을 준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로 그가 예수님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여 결국 물러가고 만 행동을 들 수 있다(22절). 그가 영생보다도 재물을 더 사랑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평소에 그의 우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제 1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이다. 또한, 율법의 속뜻인 인간 사랑에 있어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철없는 부자 관원인 청년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주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에 대해 (1) 그의 사랑스럽고 확실한 성품과 솔직함과 순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함 때문이라는 설(A. Barnes), (2) 외적으로 심한 죄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C. R. Erdman), (3) 성실한 구도 자세 때문이라는 설,1) (4) 그가 구한 문제 해결을 위한 권유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19, 마경일) 등이 있다.

앞 구절(20절)의 해석을 미루어 (3)설과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 권유하신 내용은 행함으로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지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나를 믿어라’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명령을 하신 분에 대해 완전한 신뢰나 자기 포기가 없다면, 그 부자 관원인 청년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청년이 영생을 얻는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앞서 언급한 계명들에 대한 추가적인 성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J. Calvin, J. Gnilka, 하권, p. 119, E. Schweizer). 따라서, “참된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특징짓는 자기 희생적 헌신”(W. L. Lane)이나, “사랑이나 동정”(E. P. Gould) 등의 결핍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표현된 내용을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류인 것이다. 이 점은 예수께서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라거나,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리고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시지 않은 점과 성경의 구원관이 행함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요3:16, 갈 3장, 엡 2:8)2)으로도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말씀은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영생의 주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결정적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W. Hendriksen, D. W. Burdick, 黑崎幸吉, 이상근.
2) 필자의 요한복음 3:16의 주석과 갈라디아서 3장의 주석과 에베소서 2:8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장해가 있는 것을 아셨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소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의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곧 신이었다. 이것이 그 나름대로 계명을 열심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영생을 얻을 방도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결정적인 이유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영생을 목전에 두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결단의 표로서 재물을 포기하고, 재물에 집착된 마음과 재물이 구원받은 한 표징이라는 유대교의 교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영생의 주님 예수와 그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터득해야 한다. 그 경우에 그는 전혀 새로운 곳인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즉, 성격상 하늘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늘에 온전히 보전되어 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미리 맛볼 수 있는 모든 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물론, 그 핵심적인 것은 영생이다. 아직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영생의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표면적 권유는 그 청년에게 해당되는 것이 확실하다.1) 그러나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마 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언제든지 주님 예수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결단의 표로서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 관원인 청년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J. A. Bengel, W. W. Wessel, W. L. Lane, E. Schweizer, E. P. Gould, E. Bickersteth, C. E. G. Swift, F. C. Grant, R. Earl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의 비극적 결단은 영생을 얻는 것보다 재물을 훨씬 더 사랑한 것을 반영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6:24에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마 6:24) 재물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는 영생 대신에 슬픔과 근심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결단을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결단을 했어야만 했다.

크랜필드는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 것이다.”1)라고 했지만, 오히려 풀루머는 “그는 갑절의 실망으로 우울하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공로를 세워볼 수 있는 어떤 모험적인 것이 요구되지 않고, 그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라고 요구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후자가 더욱 그럴듯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Total Reply 0

Number Title Author Date Views
Notice 관리자 2012.05.23 4118
172 백남신 2024.04.13 276
171 백남신 2024.03.27 530
170 최세창 2023.10.03 312
169 최세창 2023.09.25 261
168 최세창 2023.09.11 279
167 최세창 2023.08.29 269
166 최세창 2023.08.19 291
165 최세창 2023.08.11 287
164 최세창 2023.08.02 268
163 최세창 2023.07.25 266
162 최세창 2023.07.19 249
161 최세창 2023.07.11 244
160 최세창 2023.07.01 255
159 최세창 2023.06.21 280
158 최세창 2023.06.12 249
157 최세창 2023.05.31 267
156 최세창 2023.05.24 257
155 최세창 2023.05.17 260
154 최세창 2023.05.12 261
153 최세창 2023.05.05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