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절 미감리회 남감리회 선교부 선교 시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0-01 23:20
조회
1783
제 1 편 역사와 교리
제 1 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
제 1 절 미감리회·남감리회 선교부 선교 시대

[2] 1.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던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 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는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어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맥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부부를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3] 2.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평양에서 엡윗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청장년선교회,남선교회,여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4] 3.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이던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한영서원,호수돈여학교,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5] 4. 부흥운동과 토착 신학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 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6] 5.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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