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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생애, 구원론, 영성

작성자
강단과 목회
작성일
2006-04-17 13:41
조회
5578
웨슬리의 생애

  웨슬리는 1703년에 사무엘과 수잔나 웨슬리의 19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나 179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적 훈련의 좋은 토양이 되는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잔나는 그의 영적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런던 챠터하우스 학교에 다녔으며, 옥스퍼드대학교의 그리스도 쳐치 대학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에 영국국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 1725년 안수를 받았다. 그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링컨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학문적인 심화를 이루었다.
  옥스퍼드에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와 함께 젊은이들의 작은 그룹을 만들었다. 그 그룹의 목적은 함께 성서와 고전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곧 그 그룹의 리더가 되었으며, 다른 활동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예배도 드리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감옥을 방문하고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찾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들을 ‘성경벌레’ 혹은 ‘신성클럽’ ‘규칙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영적 교제는 웨슬리의 영적 생활이 점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며 확장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웨슬리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거룩한 삶을 위한 훈련과 집중적인 노력을 한 후에, 1735년 미국 조지아 주의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었다. 이는 주변의 친구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결단으로 보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것이 초대교회의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선교사가 되고자 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신의 영혼 구원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믿음의 순수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조지아 주의 경험은 웨슬리에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선교사로서 단 한 명의 원주민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대신 조지아 주 사바나로 이민 간 교포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게 되었다. 결국 선교에 실패하고 1738년에 영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웨슬리는 사랑하던 여성과도 헤어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콜만은 웨슬리의 엄격한 질서와 규칙이 새로운 세계에서 신앙적으로 다소 느슨해진 이민 개척자들에게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좌절을 곱씹으며 영국으로 귀국하는 그때의 고뇌를 웨슬리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을 전도하고 구원시키기 위해 미국에 갔다. 그러나 누가 나를 구원시킬 것인가?”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그는 독일의 한 작은 모라비안 공동체를 만났다. 죽음을 눈앞에 둔 풍랑의 위협 속에서 웨슬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이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이 모습은 웨슬리에게 큰 충격이었다. 영국에 귀국한 후에 그는 또 한 사람의 모라비안을 만났다. 피터 뵐러였다. 그때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교리를 전해 주었다. 이렇게 모라비안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마침내 올더스케잇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들의 작은 기도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찾아 방황하던 그 무엇을 찾게 되었다. 그 날이 그 유명한 웨슬리의 회심일인 1738년 5월 24일이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그때의 경험을 기록했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그리스도 한 분만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속하시고 죽음과 죄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증을 경험했다.” 이 경험은 그의 생을 불살랐으며, 전 영국에 불을 붙였다.
  그 당시 영국은 극심한 가난과 도덕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그 어떤 변화는 절실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웨슬리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 그 당시 교회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웨슬리는 그들 앞에서 설교를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속회를 만들고, 다시 그들을 순회전도자로 훈련시켰다. 감리교 초기 운동은 리더십과 훈련의 부족에도 위축됨 없이 큰 부흥을 이루었다.

웨슬리의 구원론

웨슬리는 ‘구원의 성서적 방법(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과정뿐만 아니라 구원의 분명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선재적 은총 :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찾아오시며 우리 삶에서 이미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이 은총은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하는 은총이다.
  2) 회개 :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모든 죄에서 거룩한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의를 신뢰하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칭의(의인화) :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 아니고서는 타락한 죄인에게 의롭다 하심이 일어날 수 없다. 십자가의 은총은 주관적, 인간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수동적으로 다가오는 전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의로움이 전가되고 옷 입혀지는 단계다.
  4) 거듭남 : 칭의가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객관적 은총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주관적, 실제적인 변화다. 우리 내면은 하나님의 형상이 시작되는 영적 아기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
  5) 성화 : 성화란 의인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거듭남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난 영혼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는 은총이다. 성화는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에 시작하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날마다 성장하여 완전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성숙하여, 결국은 기독자의 완전에까지 자라는 과정을 의미한다.
  6) 완전 : 완전은 완전 성결의 상태를 의미한다. 완전은 죄의 뿌리까지 뽑히는 것을 뜻하며,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는 단계다.
  7) 영화 : 구원의 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영화는 예수의 부활의 몸과 같이 부활의 영화된 몸을 입는 단계이며,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

웨슬리의 영성

  웨슬리의 영성의 핵심은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신앙인의 삶, 즉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을 완전을 향해 날마다 거룩하게 변해가는 성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의롭다 인정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의롭게 즉 성결되게 변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화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계는 초기의 성화로서, 우리가 거듭남으로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으나, 아직은 온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한 영적인 상태를 말한다. 둘째 단계는 온전한 성화로서, 깊은 영적 체험에 의해서, 죄 된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고, 온전한 변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는 이 온전한 성화를 기독자의 완전이라 부르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온전한 성화, 즉 기독자의 완전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성결한 자가 지켜야 할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자만하지 않도록 경계하여 기도할 것
② 자만심의 열매인 열광을 경계할 것
③ 도덕 무용론자를 주의하여 방종한 생활을 삼갈 것
④ 게으름을 멀리할 것
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열망하지 말 것
⑥ 그리스도 교회를 분열케 하는 당을 짓지 말 것
⑦ 범사에 남의 모범이 되고 등불이 될 것

참고문헌,
원종국, 위대한 영성가들, 도서출판 kmc, 2006
권희순, 웨슬리 영성수련 프로그램, 도서출판 km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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