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일분 이해하나
표현하신 글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제 짧은 생각을 몇 자 적습니다.

“담임목사를 고발하고 동료장로를 고발하는 패륜아 같은 장로를 응원하고 부추기는 더 나아가 불공정한 판결을 일삼는 재판위원들을 규탄하며 이런 엉터리 재판이 이어지는 한 향후 감리교단에 대한 소망은 없다고 봅니다” 라고 하셨는데 담임목사를 고발하고 동료장로를 고발하는 패륜아 같은 장로를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패륜아 같은 장로라… 너무 지나치신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오랜 법적 다툼에 상호간 견원지간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이 되나 이곳 게시판에는 많은 분들이 보고 판단을 합니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 담임목사를 고발하고 동료장로를 고발하는 일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러나 동대문교회에서는 벌어진 일입니다.
결과만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담임목사를 고발하고 동료장로를 고발한 분들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이 분들은 한 때 “을”이셨고 한 때 장로님을 비롯한 다수의 동대문교회 교인들은 “갑”이셨습니다.
십 여 년 넘게 진행된 법적 사건 속에 동대문교회는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통일된 의견에 벗어나 있는 소수에게 지나치리 만큼 매정했었습니다.
소위 따가운 눈총, 왕따가 있었습니다.
몇년 전 은퇴한 원로장로 추대식에서 특정 장로를 제외시킨 일은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따가운 눈총, 왕따를 견디어 내지 못한 분들은 교회를 자의반 타의반 떠났지만, 강하게 반발하던 분들은 급기야 “제명”을 당했는데 오랜 기간 제명 당한 분들의 수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제명은 당사자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고 인격 모독에 가깝다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오래전 사건으로 제명의 권한을 행사하는 현장에 있었던 분들이 이제 제명의 대상이 되어 권한을 박탈당한 그 마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평생을 섬기던 교회에서 제명을 당한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실 수 있으신가요?

제명당한 분들은 분명 당시 “을”이었고 제명한 분들은 당시 분명 “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명당한 분들이 이제는 고발을 하여 그 을과 갑의 관계가 역전이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교단에서 출교 판정을 받고 장로가 지방회, 연회에서 정직 판결을 받은 것은 있어선 안될 큰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행동과 상관없는 제3자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제명당한 분들이 고발을 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부메랑이 되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땅콩회항 사건을 통해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후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엄청난 사건이 자신 앞에 나타날 줄 알았다면 조현아 씨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수많은 재판 속에서 동대문교회가 언제쯤 자유하게 될런지요?
재판은 결국 누가 이기든 지든 “갑”과 “을”을 가리는 싸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법적 판단에 의지해 누가 과연 “갑”인지 “을”인지 가려내는 것이 주님의 핏값의 산 교회에 과연 얼마나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우리 감리교회의 부조리함이 곳곳에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교단의 엉터리 재판이라고만 치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일부분일지라도 겸허하게 인정하셔야 할 것은 인정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여전히 출교 판결을 받은 담임목사와 정직 판결을 받은 장로는 아무 죄가 없고 현대판 빌라도 재판을 받았노라고 주장하시면
적어도 이 곳 게시판에서 글을 읽고 판단하시는 분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면 장로님의 분통 터지는 글에 수많은 성화와 댓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뒤를 이어 정통성을 인정받은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의 말도 안되는 사건에서 그의 선언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던져 줍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

유다는 창녀로 변장하고 나타난 며느리에게 속아 성관계를 가졌고 그 결과로 며느리가 임신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속았다는 분통이 유다에게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구실도 있었습니다.
도장과 지팡이, 끈이 물증으로 제시되었지만 전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믿음과 양심을 저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다말을 죽여버림으로 영원히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겸허히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며 “그는 나보다 옳도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자신의 옮음만을 증명하려는 이가 많습니까?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자신의 옮음이 드러나는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면 수없는 싸움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겨갈 길 다 마친 후 의의 면류관을 받는 일이 우리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우리들의 싸움이 얼마나 선하지 못한지를 뒤돌아 보게 됩니다.

몇 자 적는다는 것이 길어졌습니다.
장로님, 불편한 마음 갖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