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돈 천 원의 도움은 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수억 또는 수십 억 원의 도움은 재벌들이 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편리나 유익은 과학자들이 줄 수 있습니다. 건강 유지나 병 치료는 의사들이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유익이나 마음의 감동은 정신적 지도자들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성에 어느 정도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인간의 죄와 불신앙으로 인한 죽음과 영원한 멸망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지정의를 다 합쳐도, 인류 역사 이래 온 인류가 성취한 모든 결과물을 다 합쳐도 죄와 불신앙의 결과인 필연적인 죽음과 영원한 멸망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창조주요 섭리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셨다가 부활‧승천하시고, 최후 심판을 위해 재림하실 분이 그리스도 예수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
바울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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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디카이오쉬네 테우(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로서 율법 행위나 양심 행위나 윤리적 행위나 종교 의식 및 종교 행위 등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의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추앙하는 그 어떤 성인이나 도덕군자나 종교 창시자나 교주, 또는 스승이나 사상가나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완전무결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 인물인 바울 사도는 인간을 자연인인 옛사람과 주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아 거듭난 사람인 새사람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연인인 옛사람의 특성은 피조성과 죄성과 이기성과 나약성과 제한적 가능성과 필멸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의에 이를 수도 없고,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수용하고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신학의 주장처럼, 다른 종교들이나 미신이나 주술 등등을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실 필요도 없습니다. 보다 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약속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는 원시 시대부터 다원화 현상이었고, 인간은 다 양심을 지닌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의”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구원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볼 때, 인간을 의롭다고 하실 분은 영원한 의의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로마서 3:21 이하를 보면, “이제는 율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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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시는 사실이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실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놀랍고 엄청난 구원의 사랑은 복음 설교와 선교를 통해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과 족장들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충분한 방법과 방식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뤄지기까지는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신 것,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 방도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는‘믿음에서(으로부터) 믿음으로(에)’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 복음을 받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믿음에서 복종하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냥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처음도 마지막도 믿음뿐이라는 뜻입니다.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여 받아들이는 방도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인간이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6 이하를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2:3 후반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2:8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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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믿게끔 역사하시는 주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스스로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구원받는 방도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9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밝혔습니다.
율법 행위나 어떤 종교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경지에 이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칭의라고 합니다. 여럿이 음식을 먹고 난 후, 누군가가 음식 값을 다 지불하면 안 낸 사람도 낸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칭의란 죄가 없는 사람에 대한 무죄 선언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속죄의 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루터(M. Luther)는 “그리스도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와 불신앙 때문에 죽음과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주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성령을 좇아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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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에서도 수석이었고, 아주 탁월한 크리켓 운동선수였습니다. 전 영국 크리켓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캠퍼스 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 그리고 돈과 명예,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그러자 그 C. T.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3. 맺음말
성령의 역사로 주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박국 2:4을 인용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이 교만하고 거짓된 갈대아의 침략으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확증한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말씀에서 보다 깊고 오묘한 영적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