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뉴스 속보로 등장한 전용재 감독회장과 “신기식 목사외 2인의 소송취하”를 합의키로 했다는 소식이 몇 장의 사진과 함께 등장한지 불과 며칠 만에 “소송취하 합의조정 결렬” 이라는 글이 다시 올라왔다. 이미 끝이 난줄 알았던 내용들이 그동안 이어왔던 까닭이다. 참으로 하는 일들마다 정상적인 구도자의 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들이다.

도대체 지난 수년 동안 몸담고 있는 교단을 통하여 받은 것은 은혜뿐 일터인데, 섬기려는 모습들은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소속된 교단내면의 아픔을 “침소봉대” 하여 나팔 불어 불신자들들 로부터 비웃음을 갖게 하는, 세우기보다 허무는데 집착하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들을 언제쯤 중단할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이제는 모두가 포기한 탓인지 대놓고 말리는 이들도 없다.

선거 때만 되면 연회든 총회든 온갖 “미사여구 동원하여 자신을 불살라 교단을 일으키겠노라” 빈 깡통소리 요란하게 목소리 높이든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기에 영혼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처럼 황당한 일들을 언제까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만 보고들 있는 것인가?…

소송의 당사자들에게 드리는 질문이다.

내세울 것 없는 목사이지만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의 한사람으로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문제 가 있어 묻고자 한다. 먼저 지금 조정 당사자로 거론되는 이들에게 드리는 질문이다.

어디에 기준한 의(義)이고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들을 감리교단의 1만여 명의 목회자 중 한사람으로 생각하며, 본인들에게 십자가란 과연 어떠한 의미 인지를 묻고 싶다. 지금의 이 모습들이 그동안 30여년 이상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구도자로 살아온 신분의 격에 맞는 행동들이며, 그에 따르는 결과에 대하여 감당할 자신감들이 있는가?

미래를 모르는 이교도의 사회에서야 보이는 삶이 모두기에 이 땅의 삶에 올인 하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때로는 자신들이 소속된 조직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윤리와 도덕, 겸양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소명에 산다는 이들이 이 무슨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들인가?

지금 자신들이 몸담아 섬겨온 교단의 지도자의 약점을 잡았다 생각하고 협상이라는 미명으로 겁박하고 있는 행태는 진정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모습이며 단순히 자신들의 격을 높여 지도자를 흠집 내기위함일 뿐, 정상적인 신앙인들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그리고 미안한 표현이지만 본인들은 그럴만한 명분이 없다. 선거당시에 한편에 치우쳐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선거전날“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으로 주님 앞에서 결과에 따르자고 말한 이들이다. 그리하고도 본인들의 기대와 다른 결과라 하여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두고 지리 한 소송으로 상대정죄하며 온갖 수단 동원하여 이어갈 일들은 아니다. 부디 오만한 자리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초심으로 돌아가 구도자의 격에 맞는 성찰함으로 나아감이 본인들의 남은 사역과 주변의 따르는 이들을 위하는 일임을 명심할 일이다.

교단의 모든 책임의 위치에 있는 감독회장께 드리는 질문이다.

다음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감독회장께도 구도자로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가까이 할수록 영웅이 없다는 말처럼, 개인적으로는 수도원의 후예들로서 “적수공권”으로 분당의 황무지에 불꽃교회를 일으킨 영성을 존경했기에 기대한바가 있었으나 오늘에 이르러는 아쉬움이 크다. 전용재 목사께서는 선거당시에 선택을 호소하면서, “모두가 함께 웃고, 함께 나가는 스마일 감리교회”를 만들 것을 약속했다. 감리회 위상을 정립하고 감리회에 숨겨진 인물을 발굴해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약속하셨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얼마나 웃고 있으며, 얼마나 인재를 발굴하고, 얼마나 교단의 위상을 높이고계신가?

감독께서 취임하면서 첫 번째 한일은 교단 홈페이지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개혁을 논하려면 널리 의견을 들어야함은 당연 할 터인데도 들어야할 채널은 닫아놓고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가만히 있는 홈페이지를 들쑤셔놓아 많은 이들 불편하다 아우성인데도 요지부동으로 있다. 도대체 감독회장께서는 무슨 생각이며 지금 시중과 교계에 회자되고 있는 온갖 험한 소문들은 듣고 계신가? 이제는 교단의 개혁 특위를 조직하여 활동을 장려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에 대한기대 예상과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다.

이미 교단 안에는 교단의 장. 단기 발전위원회와 장정개정위원회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위원회가 있다. 모두가 감독회장의 관할하의 조직들인데, 기존위원회의 소속된 이들과 화합하고 뜻을 모을 생각은 하지 않고 또다시 특위를 만들면 개혁이 되는가? 성직자와 구도자에게는 그가 누구든지 지키며 가야할 정도가 있고 책임에 걸 맞는 성품과 그에 따르는 부단한 희생이 필요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가려면 같이 가야한다”고했다. 지난달 청계광장에서 본인이 인용한 말씀이다.

일평생을 주님께 자신을 맡겨 100만의 영혼을 구원한 D. L무디의 어록 중에 “100명중 1명은 성경을 읽고 나머지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주님의 엄위 앞에서 부름 받음이 분명하다면 각자 심비에 새겨둘 말씀이다.

오늘의 시대를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드리는 부탁이다.

말씀의 정도를 벗어나 타락된 시대마다 반복되는 아픔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이라면 금세기초의 제정러시아가 허물어져 공산화될 때의 일화를 명심할 일이다. 혁명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민중들의 증오심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기 전날,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들이 교회당에 모여 밤늦도록 논쟁을 벌였든 내용의 주제가 무엇이었는가? 고작. “바늘 끝에 천사는 몇 명이나 올라가 앉을 수 있는가? 축도할 때 손의 각도를 몇 도로 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가?” 날밤 지새우며, 상대비난하며, 자기목소리 높인 내용들이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당사자들 모두가 척살당하고, 그이후로 근 1세기동안 전 세계의 얼마나 수많은 이들이 죽음과 형극의 길을 걸어왔는가? 그 아픔이 오늘 이 땅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짧지 않은 기독교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목숨 걸어 감당해야할 사명을 가볍게 여기고 변질되어가는 시류와의 영합을 거절하지 못하여 굴복한 이들마다 심각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모두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도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살고 있다면 당연히 “제자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야할 세상으로부터” 오히려 비웃음과 이토록 처절한 능욕과 책벌을 당하는 것이 과연 영혼구원과 관계된 핍박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소명에 사는 구도자에게 있어서 때론 “사명을 잃어버리고 어설프게 살아있음은 차라리 죽어있는 것보다도 더 악할 수가 있다.”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여 보답하는 열매는 없고 부끄러운 죄인의 흔적들뿐이다. 부디 각자 떠났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가난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