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보게 된다는 사실도 알도록 하겠습니다. 지속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보통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이 보이시는 은혜는 보이지 않기도 보이기도 합니다. 하늘 사랑의 양은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보이면 보는 것이고 안 보이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셔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로 가시니 이전에 내 눈에는 안 보이던 것이 이후에는 보여집니다. 주님 안에서 아버지의 눈으로 내게 보여집니다. 조금 있으면 이라 말씀하시니 경험하고 나서야 알도록 하십니다. 정해놓은 때를 맞아서야 보며 알게 됩니다.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는 듯이 마는 듯이가 아닙니다. 조금 있으세요. 펼쳐놓으시는 역동적인 하늘의 구원을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니 이후에 보게 된다는 사실에 믿음이 없는 것을 아십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요. 당장에 얻을 것에 관심을 가져 익숙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조금 있으면 볼 수 없다면 다시는 못 본다고 여깁니다.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으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요. 통곡하고 마음 아프겠지만 세상은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겠습니다. 세상 기쁨에 취해 있습니다.
걱정하니 조금 있으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프고 근심하여 큰일이 났다고 여기지 마세요. 조금 있으세요. 기쁨이 됩니다. 애통으로 누리는 기쁨은 세상 기쁨과는 다릅니다. 고통이 짐지워져 있으나 조금 있으면 기뻐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픔은 소리 없는 통곡으로 속으로 흐르며 배신과 거역이 찌르는 고통 베이는 저림으로 파고 들지만 조금 있으면 하늘이 내리시는 기쁨으로 변합니다. 슬픔의 무력함이 속에서부터 새어 나오지만 조금 있으세요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장막이 거둬집니다. 슬픔도 참고 애통함도 삼키고 지금은 조금만 있으세요. 몸을 푸는 여인이 근심하지만 아기를 낳으면 고통은 지워집니다.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이 고통의 기억을 삭이지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사람에게 고통도 주나 기쁨은 큽니다. 근심이 있으나 주님 뵈옵는 것으로 기뻐하시겠습니까. 다시 뵈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근심을 기쁨이 되도록 하십니다. 무엇에 이 기쁨을 빼앗기겠습니까. 말씀의 얼굴로 내가 마주 대하겠으니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그 날에는 조금 있으면이 무슨 의미인지 나를 보고 기쁨이 되는지를 압니다. 서로 물을 것도 내게 묻지도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믿음이 사실이 됩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시요. 내 이름 앞으로 내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하면 내 이름으로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구하세요. 그러면 받습니다.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