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김영독목사님이 사무국 총무인가 때일겁니다.
거의 10 여년전.

파주 금촌 묘역과 관련된 대법원인가의 판결 전인가 봅니다.

그곳이 감리교회의 것이 아니라 몇 몇의 것이라는 재판이었던가봅니다.
1차는 몇 몇 승.
2차는 감리교 유지재단 승. 마지막 대법원 판결 앞둔 며칠 전 상황.

김목사님 광화문 감리회관(총리원, 본부) 방문한 저에게 민목사 감리교회가 해방후 1950년대 어땟어?라고 합니다.
부자, 권력요.
어째서? 그 땐 다 가난했잖아?
그랬조. 감리교회만 빼고. (속으론 지구상 모든 선교사가 제국주의 그거지만 유독 대한의 그것도 감리교회 선교사만 제국주의 그것이 아니라는)
그게 뭔 소리리야?
감리교회는 부자였다구요~
왜? 감리교회가?

목사님 근데 그게 왜 궁금하세요?했더니 사실 금촌묘역과 관련해 대법원 판결을 며 칠 안 남겨두고 있어서 몸이 좀 단다하시길래 뭐가 필요하시며, 감리교회 몇 몇의 분들이 뭐라하시던가요?

응. 그 때 감리교회는 가난해서 금촌 묘역 30 여만평을 구입할수 있는 재정 상태가 아니었대?
아놔~ 이런 제길.
민족사에서 1900~1960년이 감리교회 젤 융성기이고 젤 부자이던 시절인데..
물론, 항왜성전기엔 좀 여러 의견이 필요하지만 해방후부터 한국전쟁기 글고 이승만 집권기 50년대 감리교회가 가난했다니 이건 뭔 힌소리??

딱 끊고 : 감리교회가 1950년대 부자인 증거를 1시간안에 증명해 드리죠 약속.
즉각 : 옆에 있는 역사자료실 방문. 10 여권의 책 관리자의 하락하 꺼내 여기 여기보세요.
가난할 가능성이 있나요?

개체교회의 부담금도 없던 시절.
전쟁 후 개교회 500? 여곳. 재건(남하한 이북 교회재건)이나 전쟁으로 소타된 교회 재건.
아무튼, 해방 전 900? 여 전국(남북)교회중 잃은 400? 여 교회를 몇 년안에 다 재건.
[?는 정확한 숫치 아닌 대략임]
[소타 불탐]

왜 이런 능력이 생겼을까요?
거기에 농촌 목회자에게 자전거와 구두 지급.
십자군 장학생 50명. 미국 유학.
뭔 돈으로 이런걸 했을까요?
몰라?

뭔 돈으로 이랬는지 저에게 1박 2일 시간 주시면 자료를 다 찾아드리죠.
물론, 찾아주는 댓가를 약속한건 전혀 없다. 그냥 해드리기로 했을뿐.

바로, 담담 날. 자료 정리 준비.
김영동 사무국 총무님. 여기 있습니다.
무슨 책 몇 페이지. 밑줄 쫙~해서. 복사.
그걸 책임 변호사에게 전달한단다. 그러세용^^

한 보름후인가?
감리교회 유지재단이 이겼단다. 만세.
근데, 재단만. 난 모람?

난 그냥 감리교회 재산 30 여만평 지킨걸로 만족한다.

나중 들은 얘기지만 그 자료중 류형기 목사 부분은 재판에 인용되지 않았고 다른 여타의 부분은 다 인용됐다 한다.
몇 달 후 그 땅을 사는데 자금을 댄 유족을 만났다. 임원진.
그 때 난 다 말했다. 내가 당신들을 대법원 패소케한 장본인이요.
이젠 우리를 도와주시요.
아니, 왜 그러셨어요. 감리교회가 가난했다고라고??

묵묵.
그들이 그 금촌에 관련이 되어 있는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나보구 자신들의 부서기를 맡으라한다.
그러마.
아직껏. 소식은 없지만.
감리교회가 답이 없어서겠지만.

첨가 : 제가 왜 이런 글을 쓸까요?
신학교 징징거리지 말고 자주하세요.
더 치기 전에.